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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나노팹센터 ① 제도와 정책 분석

국내 나노기술 발전을 위해 ‘나노기술개발촉진법(나노기술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실질적인 법 개정이 없는 탓에 나노기술법에서 규정한 나노팹센터의 운영과 설립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국회입법조사처는 나노팹센터의 법령, 조직, 예산 등의 측면에서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주요 쟁점을 검토해 나노팹센터가 대한민국 나노기술과 산업 발전에 더욱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2002년 ‘나노기술법’ 제정

나노기술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불과한 극미세 크기를 제어 및 통제하는 첨단기술로, 정보·바이오·환경공학 기술 등과 상호작용하는 범용기술 성격을 띠고 있다. 국가적 현안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과 전방위적으로 연계되며 반도체, 배터리, 의료기기 산업과도 관련성이 높다. 예컨대, 7나노미터 이하의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반도체장비 제조기업 ASML이 보유한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필요하다. 이렇다 보니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에 해당 장비의 중국 수출 제한을 요구하는가 하면, 지난 2월엔 ASML 노광장비의 기밀 정보가 중국으로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노기술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 나노기술 연구는 기술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정부 주도의 체계적인 연구개발(R&D) 전략수립 아래 추진됐다. 2001년 당시 미국 세계기술평가센터(WTEC)의 각국 나노기술 수준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나노기술 R&D 능력은 미국의 25%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2001년 ‘제1기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고 나노기술 개발 목적의 주요 인프라 구축(5년 이내), 2010년 선진 5개국 기술경쟁력 확보 등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어 2002년 10월에는 나노기술법안을 제16대 국회에 제출했고, 11월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돼 12월 제정됐다. 법 제정 이후엔 나노팹센터를 선정,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노팹(nanofabrication)센터는 나노기술법에 따라 산학연의 나노기술 관련 R&D 시설 장비의 공동활용, 전문인력의 양성, 연구성과의 실용화, 기업 창업 지원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나노종합기술원과 한국나노기술원, 나노융합기술원, 전북나노기술집적센터, 광주나노기술집적센터, 나노공정기술센터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사업을 통해 구축된 데 이어 지난해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 전북대학교 반도체물성연구소 등 6개 조직이, 올해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초지능창의연구소 등 2개 조직이 나노팹센터로 합류했다.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

정부는 2001년부터 나노기술법에 따라 5년마다 성과를 점검하고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1기와 2기에는 연구기반을 구축하고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면, 2010년 이후부터는 전자산업 분야 등에서 나노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만큼 기술 산업화와 안전성 확립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현재는 2021년 4월 수립된 ‘제5기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바탕으로 글로벌 미래를 선도하는 나노기술 경쟁력 확보를 이어가고 있다. 5기 계획은 2030년까지 나노융합산업의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한다.

이 가운데 ‘나노팹인프라 기능 고도화’ 전략은 세 가지 중점과제로 구분된다. 첫째, 나노팹센터를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역별 지원체계와 타권역 간 연계 지원체계를 가동해 전국적으로 R&D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2025년까지 국가나노인프라협의체에 매년 2~3개씩 10개 내외의 나노팹센터를 추가하고, 권역 내 나노 반도체 관련 교육 연구산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권역별로 지원 체계도 구축할 방침이다.

둘째, 반도체 테스트베드와 차세대 반도체 개발 등 시급한 현안 대응에 주력함과 동시에 나노팹센터별 특화 분야 역량 개발을 강화해 공정 지원능력을 향상하고 기술사업화 성과를 제고할 계획이다. 반도체 후방산업의 기술 자립화를 위해서는 양산 수준의 소부장 공공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고 시험과 성능평가를 지원한다. 마지막으로 노후 시설 장비 교체 및 유지관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이용자 편의성 증진을 통해 인프라서비스 품질을 제고하는 등 중장기 전략을 세울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나노인프라 현황, 산학연 수요, 해외 우수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2024년까지 ‘국가나노인프라 발전전략’도 마련할 방침이다.

국가나노기술지도

정부는 2008년부터 매 5년마다 향후 10년의 나노기술 로드맵인 ‘국가나노기술지도’도 수립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나노기술을 △나노소자 △나노에너지·환경 △나노바이오 △나노소재 △나노공정·측정·장비 △나노안전성 등 6대 분야로 나누고 해당 기술의 발전 전망에 따른 개발 방향을 제시한다. 국가나노기술지도는 연구자들에겐 나노분야 기술개발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기업엔 기술동향을 파악해 사업화할 수 있는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6월 발표된 ‘제4기 국가나노기술지도’에서는 9개의 도전적 질문을 정의하고 문제해결 중심 나노기술 역할 제시 및 나노인프라 혁신 제고방안을 제시했다. 9개 질문은 한국의 과학기술 미래전략 2045, 미국의 내셔널 나노테크놀로지 이니셔티브(NNI), 유럽연합의 호라이즌 유럽 등 국내외 주요 정책 동향 및 미래 이슈·도전과 관련된 연구주제 빅데이터로부터 단어 동시출현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선정됐다.

이번에 제시된 방안 가운데 나노인프라 부분에서는 나노팹 시설·장비 고도화 및 인프라 간 연계·협력 확대를 통한 분야별 연구·산업화 지원역량 강화, 나노인프라 첨단 장비를 활용한 나노융합기술 전문인력양성, 나노기술촉진 관련 법·제도를 정비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챗GPT 등 초거대 AI의 등장으로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GPU의 과다한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으로 나노소재를 활용한 연산-기억 동시 수행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처리장치(CPU, GPU)와 저장장치(메모리, D램) 등이 분리된 폰노이만 구조의 한계를 극복한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또 기술지도의 활용성 및 전략성 강화를 위해 도출된 나노기술주제를 나노분야 국가 R&D 예산·사업 기획에도 활용할 방침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현행 법령이 나노팹센터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아 집행이 어려운 만큼, 로드맵 수립 이전에 법 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노기술법은 제정 이후 총 여섯 차례의 개정이 이뤄졌으나, 이 중 5건은 새로운 정부 출범에 따라 주무부처의 명칭이 제정 당시 과학기술부에서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까지 변화됐고, 심의의결기구의 명칭도 변화되는 등 다른 법률의 개정에 따른 ‘타법개정’이었다. 나머지 1건도 어려운 용어 순화와 어문 규범의 준수를 위한 개정일 뿐, 나노기술법 내용상의 개정은 전혀 없었다. 즉 2019년 일본 수출규제조치나 반도체 공급망 리스크 등 나노기술분야를 둘러싼 과학기술혁신 환경의 주요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노기술법은 제정 이후 20여 년간 실질적인 개정이 전무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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